스티븐 브래드버리(Steven Bradbury)는 호주의 쇼트트랙 선수이다. 그는 1991년 쇼트트랙 월드컵을 시작으로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올림픽까지 국제 무대에서 활약하였다.

다만 막상 올림픽에서는 별 다른 좋은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다. 1994 릴레함메르 올림픽에서는 계주 종목에서 동메달을 거두었지만 개인 주종목인 1000m에서는 달리는 도중 넘어져서 예선에서 짐을 싸야 했다. 1998 나가노 올림픽에도 출전한 종목에서 예선 단계에서 고배를 마시곤 했다.

브래드버리는 10년에 걸친 선수 생활동안 올림픽뿐만 아니라 쇼트트랙 단일 대회에서 꾸준히 출전하곤 했다. 빙상 불모지인 호주의 선수라는 걸 감안하면 녹록치 않은 여건에서 의지만큼은 높이 평가할만 하다.

그러나 2000년, 부상이라는 치명적인 돌발변수가 발생했다. 그 해 목뼈를 다치고, 목 받침을 안은 채로 치료 및 회복에 들어갔지만 실력은 옛날 기량으로 돌아올 리 없었다. 같은 해 쇼트트랙 월드컵에서는 다른 선수의 스케이트 날과 부딪쳐 과다 출혈까지 일어나는 등, 신체는 더더욱 나빠지기만 했다.

2002년 그의 나이 28세. 스포츠 선수로서는 나이가 많은 편에 속했으며, 본인도 이제 이 무대가 마지막이라는 걸 인지하고 마음을 비웠다. 단지 마지막 순간까지 완주한다는 목표만을 남기고 있었다. 그렇게 1000m 종목에 출전할 때, 누가 알았을까… 그에게 크나큰 선물이 다가올 줄은.



먼저 예선전에서는 떨어진 기량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다음 단계로 진출할 수 있었다. 준준결승에서는 아폴로 안톤 오노(미국), 마크 가뇽(캐나다), 타쿠마 나오야(일본)과 같은 조에 편성되었다. 달리기 결과는 3위. 하지만 가뇽이 타쿠마를 밀치는 바람에 실격, 브래드버리는 2위로 올라와 준결승에 오를 수 있었다.

다음 단계는 준결승. 해당 그룹에는 김동성, 리자쥔(중국), 테라오 사토루(일본)와 함께 빙상에 들어왔다. 특히 김동성과 리자쥔은 지난 나가노 올림픽때 각각 금메달, 은메달을 차지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자였기에, 다음 라운드는 꿈에도 못 그리는 판이었다. 그러나 막상 경기 중, 두 선수는 차례로 넘어지는 바람에, 가장 나중에 있었던 브래드버리는 두 번째로 들어오고, 거기다 1위로 들어온 테라오는 실격 처리가 되어 공식 기록은 1위가 되었다.

이제 대망의 결승. 안현수(현 빅토르 안), 아폴로 안톤 오노, 리자쥔, 마티유 투르콧()과 함께 5명이 달린다. 이젠 정말로 최하위인가, 어쨌든 결승까지 온 것에 감지덕지하는 마음으로 빙상에 오른다. 이번 라운드도 마찬가지로 맨 뒤에서 천천히 따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마지막 바퀴에서 앞서 달리던 4명이 모두 넘어지고 만다! 그것도 결승점 20m 앞에서. 반의반 바퀴를 남기던 브래드버리는 순식간에 순위를 뒤집어서 금메달로 들어온다. 그리고 넘어지던 나머지 선수는 허겁지겁 달려와서 오노가 은메달, 투르콧이 동메달을 가져간다.

마지막 무대에서, 유종의 미를 목표로 출전한 그는 "금메달"이라는 거대한 행운으로 경기를 마무리했다. 브래드버리는 메달 소감으로 "이건 승리가 아닌 지난 10년간 최선을 다해 달린 노력에 대한 상"이라 말했다. 특히나 이 금메달은 남반구 최초이며, 호주에서는 그의 이름을 딴 경기장이 들어서고 기념 우표까지 나왔다.

이러한 행운 스토리에서 짚어볼 만한 게 있다. 1등은 그저 우연이었을까? 아니다. 그는 충분히 금메달을 받을 자격이 있다. 본래 상은 실력이 뛰어난 선수에게 돌아가지만 출전 횟수가 많은 선수에게도 기회가 올 수 있다. 더구나 브래드버리는 말년에 큰 부상을 입어서 진작에 선수 생활을 포기해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그는 2002년까지 끈기 있게 출전했다. 또, 릴레함메르 올림픽때 수상한 계주 동메달도 있듯이 기량 자체도 꿀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완주를 위해 모든 라운드에서 최선을 다했고, 부정행위조차 없었다. 메달은 곧 성적을 나타내지만, 동시에 스포츠맨십을 격려하는 의미도 담겨 있다.

 

 

한 마디로 '운도 실력이다'는 말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델로를 즐겨하는 사람으로서 이 일화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여러 관점에서 의미를 파헤쳐보면 아래와 같다.

① 운 요소가 작용하지 않는 대회는 없다.
대부분의 대회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 그렇기에 한 라운드당 제한 시간이 주어지고, 참가자 모두가 풀 리그를 돌릴 여건이 되지 못한다. 물론 오델로에서는 스위스 방식을 이용하여 운을 가급적 분산시키려 하지만, 대회 방식 상 완벽하게 고르게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특히 유소년부와 성인부가 합동으로 할 때처럼 기력 스펙트럼이 파편마냥 갈라질 수도 있다.

한편 같은 상대를 만나더라도 흑이냐 백이냐에 따라서 기대 승수가 달라질 수 있고, 제한 시간이 얼마나 되는 지도 변수가 된다. 상대를 만나는 순서가 달라져도 컨디션의 기복이 달라진다. 거기다 대회 전 또는 중간에 있는 아침·점심 식사가 배에 미치는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그 뿐인가? 좌석이나 테이블, 판의 질감과 크기, 돌의 매끈한 정도도 영향을 미친다.

이렇게 연습 게임에 없는 요소가 산재해 있는 상황에서 이런 변수들을 원천 차단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되려 이런 운 요소도 대회의 일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당일 대회장에서 빠르게 적응하여 운을 최대한 잡아내는 것이 플레이어의 바람직한 자세다. "몇승/몇등할 수 있었는데 뭐가 방해가 됐다"와 같은 미련은 전혀 의미가 없고, 하물며 대회 주최자에게 항의하는 것은 더더욱 금물이다.

② 운을 잡아내는 것은 엄연히 실력이다.
이상적인 경기는 양쪽이 실책을 1점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완벽한 진행만을 바란다면 대회로서의 의미가 없다. 사람은 게임에서 인간 본연의 불완전함에 저항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으며, 실제로 모든 종목에서 이러한 목표로 경기에 임한다.

상대방의 실책은 경기 도중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내 실책이 좀 더 적게 나와서 승리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또한 상대가 실수를 범하기 쉽게 심리적으로 교란하는 것도 실력이다.

오델로의 경우 무조건 최선의 진행을 찾기보다는 가끔은 상대가 함정에 빠지도록 흔들어볼 수도 있다. 아울러 복기를 하다 보면 판세 그래프가 위아래로 계속 요동친다. 실력을 점검할 때, 판세가 나에게 유리해질 때 과연 내가 그 행운을 잡아냈는지, 혹은 엎었는지를 중심으로 점검해보라.

③ 실력은 대소 비교를 할 수 없다.
우리가 대회를 열고 참가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성적을 내고 자기 실력을 입증하는 것이 주된 이유겠지만, 한편으로는 연습 게임에서는 접할 수 없는 실전만의 재미를 겪어보는 것도 있다. 또, 참가자마다 실력이 제각각이라도, 우승 확률이 천차만별일 지라도 우리는 모두 최상위에 오를 기회가 있다.

축구에서 '공은 둥글다'는 말이 있듯이, 오델로에서도 이를 패러디해 '오델로 알은 둥글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변은 언제든 나타날 수 있다. 플레이어마다 각자의 논리 회로 구조가 다르기에, "A<B<C<A"와 같은 상성은 심심찮게 나온다. 레이팅·랭킹 시스템은 성적으로 산출한 지표이자 그 사람의 기대 승수를 가늠하는 척도일 뿐, 특정 대회에서는 결과가 엇갈려 나올 수 있다.

이렇게 승패 관계가 맞물려 있는 상황에서 누구와 만나는지에 따라 성패가 달라진다. 물론 위 문단에서도 말했듯이 같은 상대라도 섣불리 부등호를 표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이러한 모호함은 우리들에게 '운'으로 다가온다.

④ 개근 정신도 실력이다.

운을 잡아내고 싶다면 운이 최대한 많이 다가오게 하면 된다. 그렇다면 방법은 간단하다. 대회에 많이 출전하는 것이다. 이는 앞서 소개한 쇼트트랙 일화와 연결된다. 기본적으로 행운은 출전 횟수가 많은 자에게 돌아간다. 열정은 곧 행운이자 실력이다. 상위권에 올라가고자 하는 의지를 꾸준히 유지할 때 비로소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실제로 본인은 2020년도 왕중왕전 때 4명 중 2위를 차지했다. 이건 인원 수가 적을 시기에 참가했기에 준우승의 관문이 평이했던 것도 있지만, 협회에서는 이 또한 공식 준우승으로 받아들인다. 또한 필자는 2018년 7월부터 2023년 2월까지 모든 국내 대회에 개근하였고, 마침내 2022년도 명인전에서 6명 중 1등을 차지했다. 여기에는 특별한 비결은 없다. 단지 오프라인에 나오고자 하는 의지 하나로 커리어를 쌓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어느 날 여러분이 대회에 나갔더니 운이 잘 따라주지 않았다 싶다면, 다음 대회에 다시 나오면 된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좋은 성적을 거두고 싶다면 스스로 주최자에게 참가 의지를 적극 어필하라. 이 모든 경험은 스스로의 기량을 쌓아올리는 최고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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